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09
한자 黃石山城-義兵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정용

[정의]

정유재란 때 경상남도 함양군의 황석산성을 둘러싼 의병과 왜군의 치열한 전투.

[함양의 의병활동]

의병항쟁은 임진왜란 때 전쟁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자, 희생과 구국정신으로 침략군인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임진왜란 때 활약이 컸던 의병장으로는 곽재우·고경명·조헌·김천일·김면·정인홍·정문부·최경회·김덕령·조종도 등을 들 수 있으며, 경상우도 지역에서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 발발 초기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은 왜군의 전략적 진격행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고, 정유재란 때 피해가 컸다.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는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 임명된 김성일이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2년 5월 함양에 도착한 후, 같은 해 8월에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좌도로 이동하려고 할 때까지 경상남도 함양 지역을 거점으로 항전을 독려하고 의병을 모았다.

경상남도 함양에 도착한 김성일은 함양군수 이각(李覺)의 협조를 받으면서 함양 관내의 선비들을 모았다. 이때 참여한 전(前) 현령 조종도(趙宗道)가 김성일을 도와 의병모집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조종도를 통하여 노사상(盧士尙)이 합류하고, 노사상이 다시 통문을 보내 함양의 뜻있는 사람들을 모집하면서 그 규모와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함양에서는 노사상·노사예(盧士豫)·박손(朴蓀) 등이, 안음에서는 정유명(鄭惟明)·성팽년(成彭年) 등이 있었다. 함양에서뿐만 아니라 나아가 경상우도에서 의병모집과 활동에는 초유사 김성일의 역할이 컸다. 김성일은 분산적인 의병집단을 보다 체계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였고, 관군과의 불화도 해소시키는 노력을 하였다.

16세기 후반의 향촌 지배구조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을 사회적 기반으로 한 유향소(留鄕所)의 역할이 주목된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 의병의 규모와 세력이 확장된 배경에는 재지사족이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경상남도 함양에서도 사족들이 의병을 일으킬 때 향청의 임원과 그 조직을 우선 활용하였다. 전쟁의 국난을 당하여 지역민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유향소와 향약의 실시 등으로 인해 사족의 지배질서가 확립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유재란의 시작]

임진년에 왜란이 발발한 이후 전쟁의 과정에서 휴전이 일정 기간 성립되고, 명나라와 일본 간의 화의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결렬되었다. 1597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왜군이 다시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략하면서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1597년 1월 15일에 가토·고니시 등이 지휘하는 1만 4,500명의 왜군 선봉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고니시는 이미 1596년 말에 두모포(豆毛浦)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차지하고 영주할 계획을 서둘렀다. 당시 조선에서는 한산도를 통제영으로 삼아 남해안을 수호하던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의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해안 방어시설들을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하였다. 이후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西生浦)에 들어가 둔진하였다.

1597년 3월 중순부터는 일본의 대군이 계속 상륙하였다. 대부분 구로다·모리(毛利秀元)·시마즈·나베시마(鍋島直茂)·하시수가(蜂須賀家政)·우키다·고바야가와·아사노(淺野長慶) 등 임진왜란 당시 침략해 왔던 장수들로 총 병력 14만 1,500명이었다. 왜군들은 먼저 동래·기장·울산 등 각지를 점거하고, 웅천·김해·진주·사천·곤양 등지를 왕래하였다. 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륙군의 전략으로 패사하면서 도요토미는 울산 죽도성에서 부장(部將) 회의를 열어 육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차지하고, 수군은 전라 해안을 침범할 계획을 세웠다. 7월 말부터 왜군들은 총공격에 나서 경상도와 전라도로 진격하였다. 고바야가와를 총사령관으로 우군(右軍)은 대장 모리 이하 가토·구로다 등으로 구성하였다. 좌군(左軍)은 대장 우키다 이하 고니시·시마즈 등으로 편성하였다. 우키다를 대장으로 한 1대(隊) 5만 병력이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진격하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모리를 대장으로 한 5만의 군사는 초계·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고, 그 일부는 성주로 우회하여 안의·전주 방면으로 향하였다. 남원으로 향한 일본군은 8월 중순에 조·명연합군을 포위 공격하면서 격전 끝에 남원성을 함락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왜군은 전주를 무혈점령하였다. 전주성이 점령되기 전 왜군들이 전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우군 왜장 모리가 지휘하는 왜군은 창녕 화왕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경상우도 조방장 곽재우 부대를 우회하여 전진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8월에 함양의 안음에서는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사수하던 안음현감 곽준(郭埈)조종도 등이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반격을 받고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왜군은 고전 끝에 산성을 점령하고 육십령을 넘어 전주로 들어가 우키다 휘하의 고니시군과 합류하였다.

[반드시 지켜야 했던 황석산성]

정유년에 재침한 왜군들이 경상도에서 전라도 남원성과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곳이 함양의 황석산성이었다. 황석산은 높이가 1,190m이다.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북동쪽으로 15㎞ 지점에 있으며 월봉산(月峰山)[1,279m]·기백산(箕白山)[1,331m]·대봉산(大鳳山)[1,252m] 등과 더불어 영남과 호남을 가르는 소백산맥의 줄기를 형성하는 산이다. 황석산은 바위산으로, 기백산을 북쪽으로 마주보고 있다. 덕유산에서도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정상 일대는 2개의 커다란 암봉(巖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쪽 봉우리는 북쪽 봉우리보다 더 뾰족한 형태를 보여준다. 『여지도서』의 기록에는 황석산지우산(智雨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고, 관아의 서북쪽 15리에 있다고 하였다.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 있는 황석산성[경상남도 사적 제322호]은 함양군 안의면서하면의 경계인 황석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을 따라 축조한 포곡식(包谷式)산성이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황석산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2,924척이었다. 성 안에는 한 곳의 시냇물과 군창(軍倉)이 있었으며, 이는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하였다. 산성 안에는 작은 계곡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아 전략적 가치가 큰 곳이었다. 경상남도 함양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로 전쟁이 치열하였던 삼국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레 2.5㎞, 높이는 약 3m이다. 성 안에는 크고 작은 건물터가 있다.

현재 면적은 44만 5,186㎡ 정도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과 대체로 일치한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황석산성은 고려 때 이후 산성으로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었다. 여말선초[고려말 조선 초기의 정치적 격동기] 당시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해지는 과정에서 산성의 수축에 대한 논의가 여러 차례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조선 태종 때에 황석산성을 수축하게 하였고,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선조 때에도 산성 수축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으나 실효성 있게 진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충분한 군사적인 방어와 공격의 수단들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왜군의 재침략이 있었다. 의병부대를 포함하여 군관민은 총력을 다 하여 산성을 사수하려고 하였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황석산성이 영호남을 나누는 소백산맥을 가로지르며, 육십령으로 통하는 관방(關防)의 요새지에 있는 군사상 중요한 산성임으로 왜군이 반드시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여 인근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으로 하여금 돕도록 하였다. 안의현감 곽준과 전(前) 함양군수 조종도 등은 의병과 관군 및 안음(安陰)·거창·함양 등 인근 고을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황석산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현감 곽준은 자신이 몸소 돌을 지고 나르며 산성과 방어도구를 손질하고 점검하였다. 곽준은 태양을 가리키며 죽음으로 수성할 것을 맹세하였다. 전 함양군수 조종도는 현직 관료가 아니면서도 집안 식구 모두를 대동하여 산성으로 들어왔다. 이에 조종도는 ‘나도 임금의 신하이다.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는 시를 지었다. 그 시의 내용은 ‘공동산(崆峒山) 밖에서 사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처럼 성 안에서 죽는 것도 영광이네’라는 내용이었다. 공동산은 중국에 있는 산으로 은둔자의 상징이며, 장순과 허원은 당나라의 충신들이다. 곽준조종도 두 사람은 함께 목숨을 바치기로 맹약하면서 결사항전을 다짐하였다. 1597년 음력 8월 16일에는 우군(右軍) 왜장 모리 데루모도(毛利輝元)와 가토[加藤淸正], 구로다(黑田長政)가 지휘하는 2만 7,000명의 왜군이 의병부대가 주축이 되어 수성결의를 다짐하고 있었던 경상남도 함양 안음황석산성에 당도하였다.

[격전의 현장, 황석산성전투]

황석산성의 지휘부는 김해부사 백사림·안의현감 곽준·전 함양군수 조종도와 선비 유명개(劉名蓋)로 구성되었다. 김해부사 백사림은 출전대장(出戰大將)을 맡고, 가장 견고한 성의 동문과 북문을 관장하였다. 안의현감 곽준은 수성장(守城將)을 맡아 성의 남문을 관장하였다. 전 함양군수 조종도는 서문을 관장하였고, 거창좌수(居昌座首)로 위촉되었던 선비 유명개는 군무장을 맡아 무기고와 식량고를 관장하고 성내의 연락과 지원을 담당하였다.

황석산성은 지형상 동북쪽의 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급하며, 남서쪽은 상대적으로 평평한 지대이다. 동북면은 험한 절벽으로 된 자연성 지형으로 오를 수 없고, 왜적들은 남문 쪽으로 공격해 왔다. 곽준은 활 하나에 화살 3개를 함께 쏘아 왜적 3명을 동시에 적중시켰다. 이 광경을 본 적군은 공격을 중지하였다가 시간이 지난 후 일제히 다시 공격하였다. 수많은 왜적이 남문으로 진격해 오니, 곽준은 몸소 전투를 독려하면서 밤낮으로 항전하였다. 왜적들과의 전쟁은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산세가 험한 황석산성은 결사항전을 맹세한 안의현감 곽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 등과 뜻을 같이하면서 죽기 살기로 항거한 의병부대와 백성들에 의해 왜적들의 총공격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의병부대와 백성들은 사력을 다해 방어하고 왜적을 공격하였다. 왜적이 멀리 있으면 활을 쏘고 창을 던졌으며, 성벽 가까이 접근하면 돌을 굴려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병력면에서나 무기의 화력면에서나 극히 열세였던 산성 내의 의병부대와 백성들은 구국과 왜적 격퇴의 열의로 힘겨운 항전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날 자정이 지난 8월18일 새벽에 김해부사 백사림은 전세가 불리함을 판단하고 자신의 가속(家屬)을 인솔하여 산성을 빠져나와 탈출해 버렸다. 산성에서 가장 견고한 동문과 북문을 관장하였던 백사림이 출전대장의 엄중한 책임과 역할을 망각하고, 산성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이다. 대규모 적병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지휘부 내에서 상급 대장의 배신과 도망은 전쟁의 자멸과 괴멸의 결과를 가져왔다. 백사림이 도망간 사실을 관노(官奴) 송인연(宋仁連)이 안의현감 곽준에 급히 와서 보고하였다. 곽준은 보고를 믿기 어려워 정유영(鄭惟榮)으로 하여금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 백사림이 도망간 중대한 사태를 파악하였다. 『여지도서』에서는 ‘김해부사 백사림이 출전대장이었는데, 은밀히 다른 마음을 가지고 성문을 열어 왜적을 받아들이고는 먼저 자기 집안 식구들을 내보내고, 자신도 뒤를 따라 나가 마침내 산성이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전세는 급변하였다. 한밤은 지나고 새벽녘인데 방어군이 없는 틈을 타서 왜적들은 열린 북문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급박한 상황에서 안의현감 곽준의 아들과 사위 및 이민(吏民)들이 모두 울면서 피신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이다’라고 하면서 남문에서 궁시(弓矢)를 갖고 군기고에 불을 질러 태우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왜적들이 들이닥쳐 왔으나 곽준은 왜적의 칼날이 날아와도 오히려 끊임없이 적을 활로 쏘고 칼을 휘두르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처절한 공방전의 과정에서 조총으로 공격하는 왜적에 맞서 활과 창칼 혹은 투석전으로 대항한 것이다. 마지막에는 육박전으로 힘겨운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과 조총을 당할 수 없는 무기의 열세 등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마침내 황석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1597년 음력 8월 18일, 곽준의 나이 47세였다. 곽준의 아들 곽이상(郭履常)과 곽이후(郭履厚)는 곽준의 시신을 껴안고 통곡하다가 모두 왜적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곽이상의 부인 신씨(愼氏)는 남편이 왜적에게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무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었다. 곽준의 큰딸인 유문호(柳文虎)의 부인은 남편이 왜적에게 해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아버지와 오빠가 모두 목숨을 잃고, 남편도 희생되었는데 이 몸이 어찌 욕되게 살길을 찾겠는가’라며 스스로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었다. 곽준을 따라 산성에 들어와 군무(軍務)를 보좌하던 정유영도 그때 같이 희생되었다.

조종도는 남문으로 달려와 말하기를 ‘나와 군은 마땅히 북향으로 재배하고 이 누(樓)에서 같이 죽어야만 한다’라고 외쳤다. 조종도는 왜적과 대항하다 희생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당시 조종도와 함께 있던 아들 영한(英漢)은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산성이 함락되기 전에 유명개는 수성장 곽준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당시 지원을 나갔던 노비 물금(勿今)과 은작(銀勺)이 급히 돌아와서 북문이 함락되고 왜병이 들어오고 있는 사실을 말하면서 속히 피신하기를 요청하였다. 유명개는 말하기를 ‘전쟁 중에 피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다. 이곳에서 싸우다 죽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곽준과 상의하여 무기고와 식량고를 불지른 다음 수성장 곽준과 몰려오는 적과 싸우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유명개의 부인 정씨와 노비도 왜적의 흉기에 희생되었다.

효자 정대익(鄭大益)과 정대유(鄭大有) 형제는 안음 위천 출신으로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다. 충노(忠奴)[충실한 남자 종]로는 오좌미(吾佐美)가 있었다. 황석산성이 함락되자 형제는 오좌미에게 노모를 업게 하고 산성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장수사 골짜기에 이르러 바위틈에 몸을 숨겼으나, 왜적들에게 발각되었다. 왜적들이 먼저 어머니 류씨를 해치려 하기에 형제가 엎드려 어머니를 감싸 안다가 왜적의 칼에 희생되었고, 다시 오좌미가 그 위에 엎드려 희생되었다. 어머니만 살아남아 천수를 다하게 되었다. 그 후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추앙하였고, 조정에서는 그들의 순절을 기려 효자 형제와 오좌미의 정려를 장기리에 세웠다.

황석산성이 대규모의 왜적들을 맞아 방어와 공격을 하다 산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산성이 함락된 이후 순국과 순절로 희생된 사람들, 살해된 의병과 백성들 민관군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왜적들과의 격전의 과정에서 돌을 나르거나 부서진 병기를 손질하는 등 모든 힘을 쏟고 헌신하였던 부녀자들도 황석산성이 함락되자 왜적의 칼날에 죽기보다는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는 비장한 다짐으로 수십 척의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당시 많은 부녀자들과 백성들이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그 바위를 ‘피바위’라고 부른다. 지금도 남문 근처 절벽 아래 바위가 붉은색을 띠고 있어 당시의 처절한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황석산성이 함락된 후 왜장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승을 보고하자 도요토미가 기뻐하며 왜장들에게 보낸 자료에는 산성 내에서 353수의 목을 벤 뒤 계속해서 싸워 수천 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산성이 함락된 이후 참혹한 현장이었던 산성은 이 때문에 못쓰게 되었으며, 손질하지도 않아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덮여지고 있었다. 이에 참판 박명부(朴明榑)가 『산성실적(山城實蹟)』을 기록하였고, 『곽의사전(郭義士傳)』을 지었다.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은 『곽의사전』의 후서(後序)를 지어 김해부사 백사림이 성문을 열어 왜적을 받아들인 죄를 밝혔다.

[정유재란 후의 황석산성]

전쟁이 끝난 후 황석산성을 사수하지 않고 도망간 백사림을 백의종군(白衣從軍)[흰 옷을 입고 벼슬이 없는 상태로 군대에 복무함] 시키는 엄벌 요청과 산성을 사수하다가 장렬한 순국을 한 곽준 등에 대한 포상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법에 따른 백사림의 처벌 요청은 수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안의현감 곽준에 대해서는 선조 조에 병조참의를 추증하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으며, 광해군 때에도 증직을 하고 사제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는 황석산성을 죽음으로 지킨 수령 및 공로가 확인된 곽준·곽이상·곽이후 부자 및 조종도 등에 대한 예조의 포상 건의에 대해 광해군은 ‘황석산성이 함락되던 날 충효와 절의가 모두 곽씨의 집안에서 나왔으니, 포상을 후하게 하여 존경하고 권장하는 모범이 되게 하며, 또한 곽준 일가의 충효 대절은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일어나게 하니, 포상하는 은전을 마땅히 넉넉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인조 때에도 안음현감 곽준을 치제하고 곽준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을 두도록 지시하였다. 숙종 때에도 곽씨 집안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한 집안에서 충효열을 행동으로 보여준 ‘1집 3강’이라 하여 정려를 세워 표창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현 당본리 황암동에 ‘황암사(黃巖祠)’라는 사당을 짓고 봄·가을 두 차례 추모의 제사를 봉행하였다. 황암사는 충열공 안의현감 곽준충의공 전 함양군수 조종도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14년(숙종 40)에 건립한 사당이다. 황석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모든 분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황암사는 훼손·철거되었다. 이후 1987년에는 황석산성이 사적 제322호로 지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2001년 함양군에서는 황암사 사당을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황석산 밑에 재건하였다. 그리고 순국한 3,500여 분의 호국의총(護國義塚)을 만들어 그들의 넋을 기리고, 복원된 사당에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셨다. 매년 음력 8월 18일에 추모 제사를 경건하게 봉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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