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43
한자 趙承肅
영어공식명칭 Jo Seungsuk
이칭/별칭 경부,덕곡,문경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신은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57년연표보기 - 조승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77년 - 조승숙, 문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98년 - 조승숙, 인재 양성을 위하여 교수정 건립
몰년 시기/일시 1417년연표보기 - 조승숙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01년 - 조승숙, 경상남도 함양군 도곡서원에 배향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부여감무 - 충청남도 부여군
부임|활동지 교수정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도곡서원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병곡지곡로 859[평촌리 72]지도보기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함안
대표 관직 부여감무

[정의]

고려 말 경상남도 함양군에 거주한 문신.

[개설]

자는 경부(敬夫), 호는 덕곡(德谷),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문인으로,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 가운데 한 명이다.

[가계]

조승숙(趙承肅)[1357~1417]의 아버지는 조경(趙璥)이다. 부인은 보성선씨 선양좌(宣良佐)의 딸이다. 아들은 직제학을 지낸 조종례(趙從禮)[1376~?]이다.

[활동 사항]

조승숙은 1376년(우왕 2) 진사가 되었다. 1377년에 안극인(安克仁)[?~1383]을 지공거(知貢擧)[고려 시대에 과거를 관장하던 주 시험관]로 하여 성석연(成石珚)[?~1414], 정구(鄭矩)[1350~1418], 박위(朴偉), 우홍수(禹洪壽)[1355~1392], 허조(許操), 윤회종(尹會宗), 김득수(金得綏) 등과 함께 33명 가운데 15등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저작랑(著作郎)으로 충하사(充賀使)가 되어 북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원의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1391년(공양왕 3) 부여감무(扶餘監務)에 임명되었으나 1392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시해되고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덕곡(德谷)으로 은거하여 교수정(敎授亭)을 지은 뒤 후학 양성에 힘썼다. 두문동 72현[고려 멸망 직후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전하는 72인의 유신] 가운데 한 명으로,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 등과 교류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승숙의 저서로는 『덕곡집(德谷集)』 1권이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승숙이 백사정(白沙亭)을 읊은 시가 있다. “봄 찾아 술 싣고 외로운 마을 지나니(尋春載酒過孤村) 뻐꾸기 소리 들리는 대낮에 사립문 닫았네(布穀聲中晝掩.門) 비 뒤에 떨어진 꽃이 물에 떠 오니(雨後殘花浮水出) 인간 어느 곳도 도원(桃原) 아닌 곳 없다(人間無處不桃原).” 백사정은 함양군의 서쪽에 위치한 곳이다.

[상훈과 추모]

조선 성종은 조승숙의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유호인(兪好仁)[1445~1494]을 보내 제문을 내려주었다. 제문 내용은 교수정 앞의 비문에 전한다.

조선 숙종 때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도곡서원(道谷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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