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임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16
한자 羅州林氏
영어공식명칭 Naju Lim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나주 - 전라남도 나주
입향지 회동 -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회동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유림면 -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안의면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지도보기
성씨 시조 임비
입향 시조 임유소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임비를 시조로 하고 임유소를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개설]

나주임씨(羅州林氏)는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나주임씨 입향조(入鄕祖)는 도정(都正) 임유소(林有巢)이다. 2015년 통계청의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27만 7,699명, 함양군에는 896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나주임씨 시조인 임비는 고려 원종 때 장군직에 있으면서 충렬왕이 세자로서 몽고로 입조할 때 호위하였다. 1269년(원종 10) 세자가 고려로 귀국할 때 임연(林衍)[?~1270]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세자를 모시고 원나라 연경(燕京)에 머물렀다. 당시 세자를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훗날 2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277년(충렬왕 3)에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명을 받아 달호(獺戶)[수달 가죽 등을 바치던 민호]를 불법으로 늘려 가던 조인규(趙仁規)[1237~1308]의 행동을 비판하던 남경사록(南京司錄) 이익방(李益邦)과 남경부사(南京副使) 최자수(崔資壽)를 붙잡아 신문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282년(충렬왕 8) 영통사(靈通寺) 승려 홍탄(洪坦)이 사감을 품고 장군 임비와 더불어 중찬(中贊)으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한 유경(柳璥)[1211~1289], 상장군(上將軍) 한희유(韓希愈)[?~1306], 장군 양공적(梁公勣) 등을 무고하여 순마소(巡馬所)[원나라가 내정 간섭을 하기 위하여 고려에 둔 감찰 기관]에서 국문을 당하였으나 홍탄의 무고로 밝혀져 석방되었다. 1289년(충렬왕 15)에 충청도지휘사가 되어 원나라 개주(盖州)로 정해진 군량을 기한 내에 수송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족보에는 임비 이후 2세 임영발(林永拔)이 직장동정(直長同正), 3세 임양간(林良幹)이 정용장군(精勇將軍), 4세 임박(林朴)이 봉익대부 행호군(奉翊大夫行護軍), 5세 임영문(林永文)이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 6세 임돈세(林敦世)가 보승별장(保勝別將), 7세 임수(林秀)가 별장(別將), 8세 임선(林宣)이 봉익대부 행호군(奉翊大夫行護軍)을 각각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임비의 9세손 임탁(林卓)은 해남 감무로 있다가 조선 건국 후 관직을 버리고 회진(會津)으로 돌아가 살면서 본관을 회진으로 하였다가 회진현이 나주에 속하자 본관을 나주로 바꾸었다. 임탁의 아들 임봉(林鳳)은 봉선대부 군기소윤(奉善大夫軍器少尹)을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아버지 임탁을 모시고 두 아들 임시소(林始巢), 임유소(林有巢)와 함께 고향 회진에서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다.

[입향 경위]

나주임씨가 경상남도 함양으로 최초 입향한 시기는 조선 태종 때다. 나주임씨의 본관인 전라남도 회진에 은거하던 임유소가 아들 임상재(林尙榟)와 함께 오늘날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회동(晦洞)마을로 입향한 것이다. 임상재는 교수를 역임했으며 그의 손자 임대동(林大仝)[1432~1503]은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오자 그의 문하생이 되어 정여창(鄭汝昌)[1450~1504], 조위(曺偉)[1454~1503], 유호인(兪好仁)[1445~1494], 김일손(金馹孫)[1464~1498] 등과 교유하였다.

회동마을에 정착한 나주임씨는 조선 명종 대에 임상재의 6세손 임득민(林得民)이 안의면 월림리 황대(黃垈)마을로 이주함으로써 세거 지역이 확장되었다. 또 조선 순조 대에 진사 임회철(林晦喆)의 아들 임경수(林慶洙)가 오늘날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죽림리 내곡마을로 들어와 그 후손들이 여기에 세거하였다.

[현황]

1934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의 성(姓)』에서는 나주임씨가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40세대 규모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주임씨는 전국에 7만 3,556가구에 236,877명, 경상남도 함양군에는 372가구에 95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는 전국에 27만 7,699명, 경상남도 함양군에는 896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00년 통계에 비하여 나주임씨의 전국 인구는 증가했지만 경상남도 함양군의 경우 조금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관련 유적]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매촌마을 소재 동현정(東玹亭)은 나주임씨 문중에서 조상을 기리기 위하여 1993년에 건립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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