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운유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670
한자 農雲遺稿
영어공식명칭 Nongunyugo
이칭/별칭 농운,운거,치은,화강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공광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940년연표보기 - 『농운유고』 간행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성격 문집
저자 민치홍
편자 민영복
간행자 민영복
권책 2권 1책
행자 11행 22자
규격 28.9×19.1㎝
어미 상이엽화문어미
권수제 농운유고
판심제 농운유고

[정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활동한 유학자 민치홍의 문집.

[저자]

민치홍(閔致鴻)[1859~1919]의 초명(初名)은 치은(致殷), 자는 운거(雲擧)이다. 호는 농운(農雲)·화강(華岡),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송암(松菴) 민동혁(閔東爀), 어머니는 해주정씨이다. 경상도 진주부 진주군 가곡[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가선리]에서 태어났다. 1891년(고종 28)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중추원 의관 등을 역임하였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 농산(農山) 정면규(鄭冕圭)[1850~1916] 등과 교유하였다. 1903년(광무 7) 덕유산[높이 1,614m] 남쪽 니구평(泥丘坪)에 터를 잡고 살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세상 뜻을 거두고 운룡정(雲龍亭)을 지어 벗들과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였다. 묘소는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의 백운산[높이 1,279m] 동쪽 산기슭에 있다.

[편찬/간행 경위]

1940년에 후손 퇴금(退琴) 민영복(閔泳馥)[1886~1964]이 시문을 수집하여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농운유고(農雲遺稿)』는 2권 1책의 석판본이며, 전체 크기는 28.9×19.1㎝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반곽(半郭)은 20.3×15.0㎝이며, 행마다 경계가 있다. 11행 22자이고, 주(註)는 쌍행(雙行)이며, 상이엽화문어미이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농운유고』의 서문은 1924년에 운재(雲齋) 최영조(崔永祚)[1859~1927]가 지었으며, 발문은 1940년에 과재(果齋) 이교우(李敎宇)[1881~1944]가 썼다. 권1에는 시와 서가 있다. 권2에는 잡저, 기, 발, 명, 상량문, 축문, 제문, 행장, 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농운유고』는 함양군에서 활동한 유학자 민치홍의 학문과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민치홍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세상 뜻을 접고 운룡정에서 학문 연구를 주로 하였다. 민치홍이 남긴 시문에는 운룡정 주변의 자연 경물을 노래한 것이 다수 있다. 나라를 잃은 유학자가 세상을 등지고 자연과 지내면서 심성을 수양하고 도학을 보존하려는 의식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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