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018
한자 天主敎
영어공식명칭 Roman Catholicism
이칭/별칭 가톨릭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근대/개항기,현대/현대
집필자 주용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83년 경 - 함양면과 안의면에 천주교 신자 등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함양성당 공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0년연표보기 - 함양성당 본당 설립 완공
함양성당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함양로1165[교산리 977-6]지도보기
안의선교성당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허삼둘길3[안의면 금천리195-1]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

[개설]

함양군은 영남 지방에서 유학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발전한 곳으로 전통적인 명문세족들이 있어서 국법으로 금지하는 천주교를 선교하는 데 지장이 많았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 기호(畿湖) 지방에서 많은 교인들이 남쪽의 산간벽지로 피난하였다. 함양군의 천주교 전파는 호남 지방의 진안·장수·무주 등지의 교인들이 지리산을 넘어 남강(南江)을 따라 이동하면서, 서부 경남의 곳곳에 숨어들었던 것에서 비롯된다.

천주교는 4차례의 박해를 겪은 1850년 이후 경상남도 각 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이 무렵 다블뤼[1818~1866] 주교와 최양업(崔良業)[1821~1861, 도마] 신부가 경상남도 지구를 순회선교하고 있었다. 경상남도 지역의 선교활동 상황을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경상남도 지역에서 박해로 인해 본고장에서 살지 못하는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며칠을 머물게 되면 자연 고을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내쫓으려 하였으나 천주교가 좋은 도(道)임을 그들에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이들을 보호하고 더러는 입교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양과는 달리 관의 박해가 상대적으로 덜하였다고 전한다. 박해가 심하지 않다는 의미는 철종 때[1850~1863] 천주교 박해가 심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신부들이 선교하는 데 어려움이 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천]

함양군에 천주교 신자가 나타난 것은 1827년 정해박해 이후이다. 이들은 함양군의 북쪽 백운산 깊은 산골에 숨어 생활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느슨해지자, 함양군에서도 천주교 신앙을 위한 공소가 설립되었다. 전라도 지역 선교 담당자였던 리우빌(Liouvlle)[1855~1893], 한국명 유달영(柳達榮) 신부의 「1883년 교세통계표」에 의하면, 함양군 서하면 운곡리(雲谷理)의 대원암(大元庵)과 터골[基洞]공소가 함양군에 출현한 최초의 공소이다. 운곡리(雲谷理)는 백운산[1,279m]을 경계로 전라북도 장수군과 함양군이 접하고 있으며, 산에는 골짜기가 깊어 피난 교우들이 숨어 지내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백운공소와 운산공소가 있다.

함양군 함양읍안의면 지역에도 1883년 이후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등장하였다. 로베르(Robert)[1853~1922] 신부의 「1887년 보고서」에 의하면, 1887년에 경상도 전역에 콜레라와 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안의 지역에는 의술을 배웠던 최아우구스티노라는 천주교 신도 회장이 있었는데, 환자들을 지성으로 간호하고 죽은 자를 교회식으로 장례를 치러 주었더니,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여 입교하였다고 전한다. 1887년이면 천주교가 이미 허용된 시기로, 박해 때 교회를 떠났던 신자들이 돌아오기도 하였고 교우들의 입교도 많았다.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많은 천주교인들이 함양군으로 넘어왔다. 로베르 신부의 「1895년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피난 온 교우들의 수가 300여 명에 달하였다고 전한다. 그중의 일부는 이후에 함양군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에 전라북도 진안에 어은동 본당이 설립되자, 함양군의 천주교도들을 어은동 본당에서 관리하였다. 초대 주임 김양홍(金洋洪) 신부는 함양군에 관심이 많았다. 김양홍 신부가 활동하던 시기에 능경이, 섭자리, 마평공소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 신부들의 보고서에는 ‘함양공소’가 아니고 ‘안의공소’로 나오는데, 이것은 안의 지역이 원래는 단독 군(郡)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함양군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함양군에서는 천주교가 계속 교세를 확대하였다. 공소가 점차 확대되자, 1911년 신설된 대구교구에서는 1913년 4월에는 함양군에 본당을 설정을 결정하였다. 1940년도에 함양본당이 신축 완공되면서 천주교 신자는 거의 1,000명을 헤아릴 정도가 되었다.

해방 후에도 함양군의 천주교 교세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인근의 거창과 산청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함양군 천주교는 포교활동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복지와 환경 문제 등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지역민들과 함께하고 있다.

[현황]

2018년 기준 함양군 내에는 함양읍에 함양성당, 안의면안의선교성당 2곳이 설립되어 있고, 주임 신부가 1명씩 파견되어 있다. 함양성당에는 5개의 공소[공배, 운산, 문정, 백운, 관동]가 있으며, 안의선교성당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공소를 담당하고 있다.

함양성당의 신자 수는 2018년 기준 2,537명이고, 안의선교성당은 신자 수가 511명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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