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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과 「유두류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07
한자 金宗直-遊頭流錄
영어공식명칭 Kinjongjik-Travel Essay of Mountain. Jiri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강정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72년 8월 14~18일 - 김종직의 함양군 백무동 일대 지리산 유람
지리산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지리산 일대지도보기

[정의]

함양군수 김종직이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백무동 일대의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행문.

[개설]

김종직(金宗直)이 경상남도 함양의 군수였던 1472년(성종 3) 8월 14~18일간 ‘함양관아-엄천-하봉-중봉-천왕봉-통천문-제석봉-영신사-백무동-마천-함양관아’로 귀가하기까지의 기행 내용이다.

[조선 선비와 지리산 유람]

‘인걸지령(人傑地靈)’. 빼어난 인물은 땅의 신령스러운 정기(精氣)를 받고 태어난다는 말이다. 역사 속 걸출한 인물의 출생 설화는 늘 명산을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높은 산’을 우러르며, 이러한 산에서 자연스럽게 ‘큰 인물’을 떠올렸다. 이것이 명산이 지닌 상징성이다. 명산은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높은 덕을 닮고자 하는 ‘인지(仁智)의 산’이었다. 명산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선망 의식은 선현들의 명산 유람을 갈구하게 하였고, 그 오랜 염원 끝에 이루어진 산행기록이 바로 ‘유산록(遊山錄)’이다. ‘유람록(遊覽錄)’ 또는 ‘유기(遊記)’라고도 일컫는다.

우리나라 유산록은 문헌상 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하지만, ‘유산(遊山)’이 성행했던 조선 시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국토 인식이 고조되고 감식안(鑑識眼)[가치를 구별하는 안목]이 높았던 조선 초기, 전국의 명산이 유람 대상지로 부상하면서 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지식인의 지적욕구가 더해져 많은 작품이 산출되었다. ‘유산’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더욱 성행하였고, 유람작품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지리산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많은 작품이 산출되었다. 현재까지 발굴된 유람록만 100여 편에 이르고, 유산시(遊山詩)는 수천 편이 확인되었다. 현재 지리산 유람록은 모두 완역하여 출간되었고, 유산시는 장편 시와 연작시를 중심으로 번역 및 출간이 진행되고 있다. 이렇듯 국내의 명산 가운데 유산록을 완역하여 대중화한 것은 지리산이 최초이다. 더구나 유산록 완역과 함께 전문 연구를 병행한 명산도 지리산이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일컬어진 산이며, 삼국 시대 이전부터 산신신앙(山神信仰)이 발아된 곳이다. 불교의 전래 이후 다양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장소이기도 하다. 고대에는 대가야문화의 중심지이자 백제와 신라의 문화가 만나는 접경지였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빨치산·항일의병 등 반목과 융합을 반복하는 이념적 갈등의 역사 현장이었다. 또한 지리산 동쪽 권역의 산청군·진주시를 비롯해 남쪽 권역인 하동군, 북쪽 권역인 함양군과 남원시 일대의 지리산 자락에는 역대로 수많은 유가(儒家) 지식인이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찍부터 지리산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의 기록을 남겼는데, 전체 지리산 유람록의 7할 이상이 이러한 지식인들에게서 나왔음이 이를 증빙하고 있다. 지리산은 이렇듯 수천 년 이래로 인간과 더불어 만들어 낸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근년에는 등산인구의 천만 시대가 도래하며 역사·문화 등 배움의 장(場)으로서의 산이 각광을 받고 있다. 게다가 ‘산의 인문학’이 21세기의 미래지향적 연구영역으로 부상하면서 유독 일찍부터 인복(人福)과 학운(學運)을 지닌 지리산도 함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지리산은 우리가 사는 인근에 있어 인간의 삶과 보다 밀착된 ‘내 가까이 있는 산’ 또는 ‘우리 고장의 산’으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국내의 여느 명산보다 ‘산과 인간의 삶’이 어우러진 지리산이 빈번하게 문학적 대상으로 활용되어 왔음은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김종직이 쓴 지리산 유람록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함양군수가 되어 지리산을 유람하다]

불혹의 나이 40세(1471년) 봄,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함양군수로 부임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1472년) 8월 14~18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지리산 유람은 부임 전부터 김종직의 오랜 염원이었다. 경상남도 함양군에 도착한 후에도 고개만 들면 우뚝한 푸른 봉우리가 곧바로 눈에 들어왔지만, 때마침 일어난 흉년으로 인해 2년 동안 엄두를 못 내다가 명절 연휴를 빌미로 산행을 떠났다. 이 유람에는 김종직의 문인 유호인(俞好仁)[1445~1494], 조위(曺偉)[1454~1503], 한인효(韓仁孝), 해공(解空)이 동행하였다. 유호인은 함양 출신이고, 조위는 처남이며, 나머지 두 사람도 함양에서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은 사람이었다.

유람 코스는 함양 관아를 출발해 엄천(嚴川)을 지나, 현 쑥밭재 방면으로 가서 하봉(下峯)과 중봉(中峯)을 거친다. 그리고 최고봉인 천왕봉에 올랐다가, 통천문(通天門)으로 하산하여 제석봉과 영신봉을 지나고, 백무동(百巫洞)을 거쳐 관아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김종직이 오른 이 길은 조선 시대 지리산 북쪽 권역의 대표적 유람로인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의 ‘군자사(君子寺)-백무동-하동바위’ 방면과 다른 코스인데, 이후 이 방면으로 천왕봉에 오른 이는 변사정(邊士貞)과 유몽인(柳夢寅) 정도가 있을 뿐이다. 김종직은 이 유람을 통해 유람록인 「유두류록(遊頭流錄)」과 기행연작시(紀行聯作詩) 「유두류기행(游頭流紀行)」을 남겼다. 「유두류록」은 『점필재집(佔畢齋集)』 2권에, 「유두류기행」 13수는 8권에 실려 있다.

김종직은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부친 김숙자(金叔滋)에게 수학하여 영남학맥(嶺南學脈)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절의를 중요시하는 조선 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김종직의 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1454~1504]·정여창(鄭汝昌)[1450~1504]·김일손(金馹孫)[1464~1498]·유호인·조위 등에게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경상남도 함양군에 거주하거나, 함양군과의 인연으로 맺어진 문인이다. 특히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趙光祖)[1482~1519]에게 학통이 계승되면서 김종직은 사림파(士林派)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따라서 김종직의 역사적 입지와 학자로서의 위상은 함양군수로 재임 시 얻은 그의 문인들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 중심에 지리산 유람이 있었다.

[태산보다 더 숭고하고 빼어난 지리산]

조선 시대 지리산 유람의 목적지는 천왕봉과 청학동(靑鶴洞)으로 압축할 수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에 올라 공자(孔子)가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登泰山 小天下]’고 한 그 경지를 체득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고자 한 것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의 청학동 일대는 지리산 속 이상향이라 인식되어 온 곳으로,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에서 오는 불편한 심기를 달래기 위해 수많은 문인이 유람하였다. 김종직은 천왕봉 정상에서 맑은 일출을 염원하며 “저는 일찍이 공자께서 태산에 올라 관찰하신 것과 한유(韓愈)가 형산(衡山)을 유람한 뜻을 흠모하였지만, 관직에 매인 몸인지라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금년 가을 남쪽 경내의 농사를 둘러보던 중 우뚝한 봉우리를 우러러보고 간절한 마음이 절실하였습니다”라고 기도하였다. 이로써 김종직의 유람 또한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공자가 넓고 크게 세상을 바라보던 안목과 호방한 기상을 기르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종직 일행은 유람 이틀째 되는 보름날[15일] 저녁 천왕봉에 올랐다. 기대와는 달리 안개가 자욱하고 바람도 거센 날씨였으나, 일출을 보기 위해 그날 밤 천왕봉 곁의 성모에게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날씨가 개지 않아 일출을 보지 못하였고, 다음날[16일]은 비바람이 더욱 거세져 세석평 인근에 있던 향적사(香積寺)로 내려와 하루를 더 묵었다. 그렇게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날씨가 개었는데, 일출을 보려는 마음에 다음날[17일] 새벽녘 다시 천왕봉에 올라가 마침내 일출을 보았다.

김종직이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두 번이나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영남 지방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지리산을 ‘고향의 산’이라고 하였다. 마치 백두산을 우리 민족의 영산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경상남도 밀양 출신인 김종직은 지리산이 영남에 속하였다는 이유로 고향의 산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김종직을 비롯해 당시 조선 시대 선비들이 일출을 보던 것에는 그저 떠오르는 해를 구경하며 소원을 비는 행위와는 사뭇 다른 의미가 있었다. 이는 천문에 관한 이치를 살피는 것인데, 정상에서 일출을 보는 것은 높은 곳에서 천문의 이치를 탐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서경(書經)』의 「요전(堯典)」에는 고대 중국의 요 임금이 천문관(天文官)으로 하여금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관측하고 일출을 맞이하여 백성의 농사 절기에 맞추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도 예로부터 천문을 관측해 제때에 씨를 뿌리기 위해 일출을 관측하는 관원을 별도로 두었던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천문을 관측해 백성에게 가르치는 게 풍년을 염원하는 성왕(聖王)의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김종직도 일출을 보며 당대 성왕의 이상 정치 구현을 염원하였고, 이 때문에 기어이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자 하였다.

김종직은 「유두류록」 끝부분에서 ‘아! 두류산은 숭고하고도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숭산(崇山)이나 태산보다 먼저 천자(天子)가 올라가 봉선(封禪)하고 옥첩(玉牒)의 글을 봉하여 상제에게 올렸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뿐인가. 그는 천왕봉에 올라 다음과 같은 한시를 읊었다.

五嶽鎭中原(오악진중원) [중국 오악이 중원을 진압하고 있으나]

東岱衆所宗(동대중소종) [동쪽 태산이 그중 뭇 산의 조종이라]

豈知渤澥外(기지발해외) [어찌 알았으리, 발해 너머 삼한 땅에]

乃有頭流雄(내유두류웅) [이처럼 웅장한 두류산이 또 있을 줄]

중국의 오악(五嶽)은 동쪽의 태산,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형산(衡山), 북쪽의 항산(恒山)과 그리고 중앙의 숭산을 일컫는다. 그중에서도 태산을 으뜸으로 보아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고 부른다. 유학 내에서 태산은 공자의 덕(德)을 상징하는 것으로 병칭된다. 김종직은 지리산을 그런 태산보다 나은 명산으로 추숭(追崇)하고 있다. 김종직이 이처럼 지리산을 숭산이나 태산보다 더 숭고하고 빼어난 산으로 인식한 것은, 지리산을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여기는 자존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이 ‘지리산’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굳이 ‘백두에서 뻗어내려 남쪽에서 서린 산’이란 뜻의 ‘두류산(頭流山)’으로 제목을 붙인 것 또한 백두산과 하나로 연결된 명산이라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김종직에게 있어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이자 고향의 산’이란 인식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후학들의 지리산 유람]

김종직의 「유두류록」이 창작된 뒤 그의 문인인 남효온(南孝溫)[1454~1494]은 15년 후인 1487년에, 김일손은 1489년에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유람 후 남효온은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와 「유천왕봉기(遊天王峯記)」를, 김일손은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이 가운데 김일손의 유람은 주목해 볼 만하다.

김일손은 24세에 진주학관(晉州學官)으로 왔다가 사임하고, 2년 뒤인 1489년 4월 보름 동안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김일손의 지리산 유람은 오랜 염원 끝에 성사되었는데, 진주학관으로 내려온 것도 지리산 유람에 대한 욕구가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손은 매일 함께 유람할 동행을 찾았고 우여곡절 끝에 낙향해 있던 정여창, 스승의 유람에 동행하였던 임대동과 함께 출발하였다.

김종직의 유람은 1472년이고 김일손의 유람은 1489년이니, 두 사람의 유람에는 17년의 시차가 있다. 또한 김종직이 당시 지방관 신분이었던 반면, 김일손은 한창 혈기왕성한 20대의 젊은 지식인이었다. 두 사람의 산행에는 다소 격차가 있지만, 김일손은 스승의 유산을 계승하려는 의미에서 자신의 유람록을 「속두류록」이라 이름하였다. 김일손의 지리산행은 무엇보다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젊은 지식인의 갈망과 염원을 잘 드러내는 여정이었는데, 독특한 유람 경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김일손은 지리산 북쪽인 경상남도 함양 지역을 출발하여 용유담(龍游潭)을 구경한 후 천왕봉으로 곧장 오르지 않고 다시 함양 수동(水東)으로 간다. 그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산청객사의 누정인 환아정(換鵝亭)을 구경한다. 그 후 단성(丹城)에서 단속사(斷俗寺)와 하동 오대사(五臺寺)·묵계사(黙契寺)를 보고, 다시 중산리로 길을 잡아 천왕봉에 올랐다. 그러고는 영신봉을 거쳐 지리산 권역의 남쪽인 칠불사·신흥사·쌍계사 등 청학동 일대를 구경하고, 정여창의 은거지 악양(岳陽)으로 가서 동정호(洞庭湖)를 유람하였다. 결국 그의 유람은 지리산 권역 중 서쪽의 구례 방면을 제외한 북쪽·동쪽·남쪽 일대를 두루 둘러본 셈이었다. 그러나 구례 방면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산행이 나타나니, 김일손은 당시 지리산 권역 전체를 유람하였다고 할 수 있다.

김일손이 천왕봉에 오른 것은 유람 9일째이며, 이후 곧장 청학동으로 하산하였다. 천왕봉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함양 용유담에서 스승 김종직의 코스를 따라 올라갔어야 하는데, 이를 버려두고 지리산 동부권역을 에돌아 산청·단성·하동·덕산 일대를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험난한 코스를 밟을 수밖에 없었는데, 김일손 일행은 조선 시대 지리산을 올랐던 선현 중 가장 길고 험난한 산행을 하였다.

김일손이 이러한 의외의 코스를 자청한 것은, 산행 의도가 산을 오르는 데에 있지 않고 지리산 권역 주변의 문화와 역사를 두루 섭렵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일손의 「속두류록」에는 지나는 곳마다 보고 듣고 접한 현실에 대한 감회가 섬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김일손 일행이 경상남도 함양 지역을 출발하여 9일 동안 에둘러 갔던 그 코스는 모두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화를 지닌 삶의 현장이었다. 김일손은 이들 유적에 대해 세세히 소개하고 자신의 감회를 피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산 권역 곳곳을 지날 때마다 그곳 사람들의 실정이나 그들에게서 들은 소소한 이야기까지 상세히 기록하였다.

결국 김일손이 택한 유람 행로와 유람 기간 중 보여준 태도는 산수 경관을 즐기기 위한 유람이 아니라, 우리 국토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삶을 이해하려는 당대 지식인의 자의식(自意識)이자 염원이었다. 이는 현실성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초기 사림의 성리학적 의식이 발현된 것이며, 스승 김종직의 산행을 계승함과 동시에 자기 시대의 현실을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지리산 유람의 지침서]

조선 시대 선현들의 지리산 유람은 건국 초기부터 20세기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아주 잠시 동안 주춤한 적은 있었으나, 우리나라 어떤 명산보다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선현들의 지리산 유람에는 변변한 안내서조차 없었다. 그나마 유람자가 출발에 앞서 필독하거나 지참한 것이라면 앞 시대 선현들의 유산록이었다. 지리산 유람록은 1463년에 창작된 이륙(李陸)의 「지리산기(智異山記)」와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이 최초이나 그다지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유람자가 애독하였던 작품으로는 김종직·김일손·조식(曺植)[1501~1572] 등의 유람록이었다. 특히 김종직의 「유두류록」은 조선 시대 지리산 유람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후 수많은 문인에게 지리산 유람의 지침서가 되었다. 조선 시대 지식인이 지리산을 이해하는 기본 텍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경상북도 칠곡에 살던 이주대(李柱大)[1689~1755]는 ‘옛사람들 중에 지리산을 유람한 이가 많았으나, 특히 김종직·김일손·조식 세 선생의 유람이 가장 두드러진다’라고 하여, 세 작품이 지리산 유람록의 정수(精髓)임을 입증하였다. 함양군수 남주헌(南周獻)[1769~1821]은 1807년 3월 26일 지리산 유람에 동행하였던 경상관찰사 윤광안(尹光顔)이 가져온 김종직·남효온·김일손의 유람록을 빌려 읽고, 여정에 있던 사찰과 봉우리 이름을 미리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김종직·김일손·정여창·조식 등은 조선조 문인에겐 추숭의 대상이었고, 지리산 유람을 통해 그들과 공감하려 하였다. 선현들처럼 느끼고, 선현의 경지까지 오르고자 함이 목적이었다. 선현들의 유람을 자신의 유람 목적으로 삼고, 나아가 선현의 유람과 동일시하여 자신의 유람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려 하였던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경지를 초월하여 더 높은 정신적 가치를 궁구하려는 조선조 문인들의 유가적(儒家的) 인식 체계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5.19 오류 수정 유호인(俞好仁)[1445~1494], 조위(曺偉)[1454~1503], 임대동(林大仝)[1432~1503], 한인효(韓仁孝) 등이 동행하였다.->유호인(俞好仁)[1445~1494], 조위(曺偉)[1454~1503], 한인효(韓仁孝) 등이 동행하였다.
2020.05.19 오류 수정 [젊은 후학들이 지리산 유람] 남주헌(南周憲)->남주헌(南周獻)
이용자 의견
유** 김종직 유두류록 영문을 Kinjongjik-Travel Essay of Mountain. Jir- Kim으로 수정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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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관해 확인 가능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후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11
김** 이 유람에는 김종직의 문인 유호인(俞好仁)[1445~1494], 조위(曺偉)[1454~1503], 임대동(林大仝)[1432~1503], 한인효(韓仁孝) 등이 동행하였다. ->임대동(林大仝)[1432~1503] 삭제할것.동행 안함.위의 기록 참조. 지리산 얘기 나눈 사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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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양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답변이 늦어진 점에 대하여 죄송합니다. 해당 내용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의견 개진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2.28
김** 佔畢齋文集卷之二 / 遊頭流錄

每與兪克己,林貞叔語此。未甞不介介于懷。今年夏。曺太虛自關東來。...乃邀
克己。共
太虛。按壽親書所云遊山具。稍增損其所賫。十四日戊寅。德峯寺僧
解空來。使爲鄕導。
韓百源請從。遂歷嚴川。憩于花巖。僧
法宗尾至。問其所歷。阻折頗詳。亦令導行至地藏寺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2.28
김** 함양군수 남주헌(南周憲)[1769~1821]은->南周獻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주헌 南周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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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양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답변이 늦어진 점에 대하여 죄송합니다. 해당 내용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의견 개진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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