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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64
한자 梁喜
영어공식명칭 Yang Hui
이칭/별칭 구이,구졸암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신은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5년연표보기 - 양희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80년연표보기 - 양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58년 - 양희 신도비 건립
출생지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효우촌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양희 배향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남원
대표 관직|경력 파주목사|의주목사|장례원 판결사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함양 출신의 유학자이자 문신.

[개설]

양희(梁喜)[1515~1580]는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1520~1578],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과 더불어 함양의 삼걸(三傑)[어떤 분야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세 사람]로 칭해졌다.

[가계]

1515년(중종 10)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있는 효우촌(孝友村)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자는 구이(懼而), 호는 구졸암(九拙菴)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양천지(梁川至),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일로당 양관(梁灌)[1437~1507], 아버지는 첨정(僉正) 양응곤(梁應鵾)이다. 어머니는 검열(檢閱) 강문회(姜文會)[1433~1499]의 딸이다. 양희의 딸은 내암(來菴) 정인홍(鄭仁弘)[1535~1623]과 결혼하였다.

[활동 사항]

1540년(중종 35) 2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윤(大尹) 윤임(尹任)[1487~1545]의 권세로 인하여 외직으로 나갔다가 김해부사를 끝으로 서울로 소환되어 1568년(선조 1)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직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파주목사, 사간, 의주목사, 승지를 거쳐 1580년(선조 13)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같은 해 동지사(冬至使) 사행길에 올라 명나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옥하관(玉河館)에서 향년 66세로 병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양희의 유고는 남원양씨 문인들의 글을 수집한 『용성세고(龍城世稿)』에 전한다.

[묘소]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공배리 우산마을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구천서원 내 구천사(龜川祠)에 제향되었다. 1858년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도촌리에 신도비가 건립되고, 현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4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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