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33
한자 忠臣
영어공식명칭 Loyalist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혜금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에서 나라와 임금에게 충성을 바친 신하.

[개설]

전근대 함양과 안의 지역의 충신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와 『천령지(天嶺誌)』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충신에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에 충절을 지킨 인물,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인물, 1467년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한 인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국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 국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 이괄의 난 진압에 참여한 인물, 1728년 정희량의 난 진압에 참여한 인물, 그 외의 사례가 있었고 인물의 활동이 중복되는 경우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활동한 인물의 수가 다수인데, 효자·열녀에 대한 기록에서도 이 당시 인물들의 사례가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피해가 극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정희량의 난을 진압한 사례가 많았다. 정희량 세력이 안음(安陰)[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과 인근 지역을 제압하였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이 지역의 인물들이 많이 동원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래는 『함양군사』의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유형별로 인물을 정리하였다.

[고려에 충절을 지킨 인물]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은거한 인물들이 있다. 그 행적이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인물의 대표는 전오륜(全五倫)이다. 전오륜은 조선 건국 이후 두문동으로 들어간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 한 명이다.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도 두문동72현이다. 조승숙은 충하사(充賀使)로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자금어대(紫金魚袋)[물고기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는 주머니]를 하사받고 돌아온 큰 인재였지만, 은거하면서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박충좌(朴忠佐)의 증손 박흥택(朴興澤)은 고려 말의 재상으로 공민왕 때 정2품 판서를 지냈으나,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며 관직을 버리고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에 은거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오상덕(吳尙德)은 예문관 제학을 지낸 인물로, 조선 개국 후에 관직을 버리고 치악산에 들어갔다가 용성부로 옮겼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인물]

이시애(李施愛)의 난은 1467년(세조 13) 일어난 반란으로 함경도의 호족(豪族) 이시애가 주축이었다. 세조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본토 출신의 호족을 배제하고, 한양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이때 파견된 관리들이 시행한 축성사업 등에 북도인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토호 출신의 이시애는 동생 시합(施合)과 매부 이명효(李明孝)와 함께 난을 모의하여 5월 반란을 일으켰다가 3개월 만에 진정되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인물로 성이건(成以乾)과 정육을(鄭六乙)이 있다. 성이건은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한 공으로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올랐고, 이시애의 난에서 전사하였다. 정육을은 절충장군병마우후(折衝將軍兵馬虞候)로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다 전사하였다.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인물]

조선의 6대 왕으로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인물로 우계근(禹繼根)이 있다. 단종이 승하하자 계룡산에 들어가 방상(方喪) 삼 년을 지낸 후,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국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거나 전사한 인물들도 많다. 그중 의병 활동을 한 인물이 상당히 많이 보이고, 황석산성에서 전사한 경우가 많아 치열하였던 황석산성 전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가족이 함께 의병 활동을 한 경우도 있었다. 박대기(朴大器) 부자의 경우를 살펴보면 박대기는 임진왜란 때 김천일과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고, 두 아들도 의병 활동을 하였다. 작은아들 박승원(朴承原)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형 장원과 고경명·고종후 부자와 함께 활동하였다. 또 정유재란 때에도 임환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격파하였고, 이괄의 난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병자호란 때에는 75세의 고령으로 조행립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임금이나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군인]을 모집하였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함께 의병 활동에 참가한 것도 눈에 띄는 일이지만, 그 아들이 일평생 한 활동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양홍주(梁弘澍)도 임진왜란 때 아들 황(榥)과 함께 활동하였다. 집안의 재산으로 무기와 군량미를 사서 이여송(李如松)에게 보내 평양 탈환에 큰 도움을 주었고, 다음 해 환도할 때에 양홍주 부자가 천 리 길을 걸어서 왕을 호위하며 따랐다. 정유재란 때 정유문(鄭惟文)은 아우 유영(惟榮)·유무(惟武)와 더불어 황석산성에 들어가 곽준, 조종도와 함께 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성팽년(成彭年)과 정유문은 임진왜란 때 정유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김면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정유문은 화왕산성에서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왜적을 방어하였다. 박명부(朴明榑)는 임진왜란 때 고향의 어른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김성일(金誠一)과 곽재우(郭在佑)의 의진(義陣)에 왕래하면서 도움을 주었다. 강이(姜儞), 강찬(姜纘), 박손, 임춘계(林春桂)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동한 인물이다.

김안수(金安守)는 금산에서, 서예원(徐禮元)과 박흡(朴洽)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인물들이다. 장만리(章萬里)는 임진왜란 당시 왕을 호위하던 중 왜적을 만나자, 옥체를 등에 업고 대피한 충신으로 기록되었다. 이극개(李克凱)는 임진왜란 때 진주 영문 좌막으로 왜적의 머리를 벤 공이 기록에 남아있다.

유명개(劉名蓋)와 유세홍(柳世泓) 부자, 정순(鄭淳) 등은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인물들이다. 유명개는 안의현감 곽준, 함양군수 조종도황석산성을 지키던 중 순절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 진압에 참여한 인물]

이괄(李适)의 난은 1624년 이괄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괄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물이지만,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 20여 일 만에 진압되었으나 한양이 점령되어 국왕이 피신할 정도의 큰 사건이었기에 진압 이후에도 이 사건이 미친 영향은 상당하였다. 우관(禹灌)은 이괄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도원수 장만(張晩)의 진으로 가 함께 싸웠다. 박이후(朴以厚)는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충청남도 공주로 피신할 때 자청하여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였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 국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

노형운(盧亨運)은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1728년 정희량의 난 진압에 참여한 인물]

정희량(鄭希亮)의 난은 1728년(영조 4) 3월 이인좌, 정희량, 박필현 등이 일으킨 난으로 전국적인 내란의 성격을 띤다. 1728년 3월 20일 정희량과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李熊補)가 안음에서 일어나 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다. 그 후 이인좌의 군대와 합세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고, 관군에 의해 난이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안음은 함양과 거창으로 나누어졌다가, 1767년 안의현으로 고치게 된다.

정희량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싸운 인물들이 상당히 많다. 이숙(李櫹)이숙의 아우·아들 등 8명이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켜 삼백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고, 정희량이 팔량치를 넘으려 할 때 서리산 아래 매복하여 적이 재를 넘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하여 적이 거창 초현으로 도망치자, 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을 되찾았다. 염마당(廉麻堂)과 염일광(廉一光) 부자는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 21인을 잡는 등 공을 세워 『감란록(勘亂錄)』에 기록되었다. 또한 박사지(朴師智), 우홍선(禹洪善), 전근(全瑾), 전우석(全虞錫), 정지교(鄭之僑) 등이 정희량의 난 당시에 의병을 일으킨 인물들로 기록되어 있다. 정지교는 적의 기밀을 운봉 현감에게 알려준 공이 기록되어 있다. 박춘봉(朴春奉)은 대동색리(大同色吏)로서 창고를 지키고, 양곡이 빼앗기는 것을 막다가 해를 입었다. 하윤택(河潤澤)도 하용호(河龍鎬), 김재경(金載鏡)과 함께 창고를 지켰다고 한다. 양의규(梁義揆), 양중당(梁重唐), 이엄(李儼)은 정희량의 난 때 토적에 앞장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덕추(李德秋)는 이시오, 이시휘를 인솔하고 적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임문옹(任文翁)은 정희량을 잡았다고 한다. 정윤헌(鄭胤獻), 정희운(鄭熙運), 찬헌(纘獻), 승헌(承獻), 소헌(紹獻), 중헌(重獻), 상헌(尙獻), 사헌(師獻), 진후(鎭厚) 9충신 또한 함께 몸을 바쳐 싸웠다 한다.

[기타 인물]

여윤철(呂允哲)은 평안절도사로 활동하였고, 전라수사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다 사망하였다. 여윤철은 생전 상품이 몹시 깨끗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집에 먹을 물을 담을 항아리조차 없었고, 장례를 치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정복형(鄭福亨)은 숙종 때 역적을 토벌한 공로로 도총도사에 제수 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2.19 정용 관련 서술 삭제 정용이 황석산성에서 항전하다가 8월 18일 전사 -> 삭제
이용자 의견
김** 桐溪先生續集/鄭義士傳
義士諱庸。名雖武人。常有士君子志操。壬辰亂時。以老未有所屬。聞金沔起兵。慷慨言當此急難。雖老豈可退坐。赴沔陣中。沔義之。常置左右。與謀軍事。其信重加於參謀...及沔卒。歸兵使崔慶會。當晉州守城時。慶會憐其老。解使歸家。庸以臨亂退去爲不義。區處家事。與家人相訣。竟死城中。
  • 답변
  • 디지털함양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의 의견을 검토하고 근거 자료를 확인하여 해당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의견 개진에 감사드립니다.
2019.12.18
김** 진주성을 지키던 정용은 두 조카와 함께 촉석루 밑으로 투신, 자결했다. 이때가 계사년 1593년 6월 29일이고 정용의 나이 55세였다.

정용은 황암사 별묘에 모셔졌으나 진주성에서 순국하신 분이다. 안의출신임으로 별묘에 모신 것일 뿐이다. 황석산성 순국으로 날짜까지 만들어 기술한 것은 조작이다. 삭제해야 함.
2019.12.18
김** 정용은 임진왜란 때 김면(金沔)의 진에서 전투에 앞장섰던 인물로,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에서 항전하다가 8월 18일 전사하였다.

만월당 정용 유적비
‘충순위 내금위장 의사 중재 진양 정공휘용유적비(忠順衛內禁衛將義士中齋晉陽鄭公諱庸遺蹟碑)’ 1964년 김황이 지은 것.
2019.12.18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