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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22
한자 咸陽朴氏
영어공식명칭 Hamyang Bark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조선 전기 - 함양박씨, 박습이 안의현에 입향
본관 함양 - 경상남도 함양
입향지 안의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남산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이은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거면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이은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관동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난평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삼휴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삼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구만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구룡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신당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황곡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거기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송계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박언신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박언신을 시조, 박선을 중시조로 하는 세거 성씨.

[개설]

함양박씨는 신라 경명왕의 셋째 아들인 박언신(朴彦信)을 시조로 하고, 고려 시대에 예부상서를 지내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진 박선(朴善)을 중시조로 한다. 함양박씨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69명을 배출할 정도로 가세가 번성하였다. 2000년 기준 인구 조사에서 함양박씨는 전국에 38,788가구에 123,688명, 함양군은 254가구에 68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2015년도 인구조사에서는 전국적으로 163,610명, 함양군에는 57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연원]

함양박씨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셋째 아들인 속함대군(速咸大君) 박언신의 정통 후손이다. 경명왕이 여덟 왕자에게 각기 분봉할 때 셋째 박언신이 속함대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를 시조로 삼았다. 그러나 그후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가 실전되어 고려 때 예부상서를 지낸 박선을 1세조를 하고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하였다. 17세기 중반 조종운(趙從耘)[1607~1683]이 편찬한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는 박선-박인정(朴仁挺)-박신청(朴信淸)-박윤정(朴允貞)-박신유(朴臣蕤)로 이어지는 본류 외에 박공비(朴公庇)-박문침(朴文忱)-박홍수(朴洪壽)로 이어지는 가계, 박후생(朴厚生)-박운동(朴雲仝)-박희(朴禧)로 이어지는 가계도 소개되어 있다.

고려 후기 함양박씨는 관료를 많이 배출하였다. 박신유의 여섯 아들 가운데 첫째 박지문(朴之文)은 검교 군기소감, 둘째 박지빈(朴之彬)은 위위윤을 각각 지냈다. 셋째 박지량(朴之亮)[?~1292]은 1274년(원종 15) 10월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도독사 김방경(金方慶)[1212~1300] 휘하의 중군지병마사로 참전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원으로부터 무덕장군 관군천호(武德將軍 管軍千戶)로 임명되고 금패와 도장을 하사받았다. 1287(충렬왕 13)부터 판삼사사로 활동하였다. 넷째 박지수(朴之秀)는 밀직부사, 다섯째 박지온(朴之溫)은 감찰어사, 여섯째 박지영(朴之穎)은 금오위 중랑장을 각각 지냈다.

박지빈의 세 아들 박장(朴莊), 박리(朴理), 박계원(朴季元)은 모두 충렬왕 때 과거에 합격했다. 박장은 군부총랑을 지내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박리(朴理)는 충렬왕 때 국자좨주를 지냈다. 박장의 아들 박충좌(朴忠佐)[1287~1349]는 『고려사』 「열전」에 실린 인물이다. 1313년(충선왕 5) 과거에 합격한 후 감찰지평·예문응교·밀직제학을 역임하고, 충목왕 때 찬성사·판삼사사를 지냈으며,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 함양부원군으로 봉해졌다. 박지수의 손자 박인계(朴仁桂)[?~1376]는 호부상서를 거쳐 양광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1376년(우왕 2) 7월에 왜구를 무찌르다 전사하였다. 박리의 손자 박초(朴礎)[1367~1454]는 고려 말에 척불소를 올려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종 때는 이조판서, 대제학에 올랐다.

[입향 경위]

고려시대 재지 세력인 토성층(향리)은 형성된 시기부터 끊임없이 분화하고 있었다. 토성의 분화는 토성층 내에서 사족(士族)으로의 분화, 토성으로서의 지위 상실 등으로 나타났다. 함양 지역 토성들 가운데 관료를 배출하여 사족으로 성장하게 되면 그 가계는 함양을 떠나 수도권 지역이나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게 된다. 사족으로 성장하지 못한 가계도 혼인관계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함양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분화해 간 결과 함양박씨는 본관지인 함양을 비롯하여 경향 각지에 세거지를 두게 되었다.

함양 지역의 함양박씨는 본래부터 본관지에 거주해 온 가계와 다른 지역에서 입향한 가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태종 때 병조판서를 역임한 박습(朴習)[1367~1418]은 세종 즉위 초에 상왕 태종에게 군사 업무를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지방에 안치당한 바 있는데 그때 안의현에 머문 적이 있으며, 박습의 자손들이 지금의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월평마을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 순조 때는 지평을 역임한 박사형(朴思亨)의 후손 박세화(朴世和)가 경기도 온양(溫陽)에서 함양으로 들어왔다. 박세화의 자손들이 지금의 함양군 유림면 화촌리에서 살았다고 하며, 헌종대에는 박양구(朴良九)가 전라도 영암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지금의 마천면 덕전리 뇌전마을에 대대로 살았다. 박충좌의 후손 박광덕(朴光德)은 철종 때 경상북도 예천에서 들어왔고, 그 자손들이 유림면 장항리에 세거하였다. 한편 함양군 내에서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충좌의 후손 박명경(朴命經)이 철종 때 석복면에서 유림면 유평리 옥산마을로 이주하였고, 박춘영(朴春英)은 함양읍에서 마천면 의탄리 의중마을로 옮겨 살았다.

[현황]

오늘날 함양군 내 함양박씨 세거지로 볼 수 있는 곳은 함양읍 이은리 남산마을과 거면마을, 난평리 관동마을, 삼산리 삼휴마을, 구룡리 구만마을, 안의면 황곡리 신당마을, 서하면 송계리 거기마을 등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함양박씨는 전국에 3만 8,788가구에 12만3,688명, 함양군은 254가구에 68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는 전국에 16만 3,610명, 함양군에는 57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국 인구는 함양박씨가 2000년보다 4만명 가까이 증가했지만 함양군의 함양박씨는 오히려 100여 명 감소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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