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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18
한자 晉州姜氏
영어공식명칭 Jinju Ga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454년 - 강한 출생
입향 시기/일시 조선 성종 - 진주강씨, 강한이 함양에 입향
본관 진주 - 경상남도 진주
세거|집성지 대덕리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경청리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대천리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대천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옥매리 -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옥매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내백리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창평리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창평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황곡리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황곡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오천리 -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오천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강이식
입향 시조 강한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강한 등을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연원]

진주강씨는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하여 본관을 진양(晉陽)[지금의 진주(晉州)]로 하는 토성(土姓)을 하사받았다.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삼고 본관을 진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16세손 강도(姜度)에 이르기까지 가계가 외줄로 내려오다가 강도 이후 강희경(姜希經)과 강종일(姜宗一) 두 가계로 분화하게 된다. 강희경의 가계는 강복민(姜福民), 강창서(姜昌瑞), 강계용(姜啓庸), 강위용(姜渭庸), 강원용(姜遠庸)으로 이어진다. 강계용의 가계는 박사공파(博士公派), 강위용의 가계는 소감공파(少監公派), 강원용의 가계는 시중공파(侍中公派)로 다시 분화하였다. 강종일의 가계는 강극술(姜極述), 강보능(姜甫能), 강민첨(姜民瞻)[963~1021], 강단(姜旦)으로 이어지면서 은렬공파(殷烈公派)가 되었다.

『고려사』에 실려 있는 진주강씨 인물은 박사공파 강계용의 후손, 은렬공파 깅민첨과 그 후손들이다. 박사공파 인물은 강계용[국자박사], 강인문(姜引文)[전중내급사], 강사첨(姜師瞻)[감찰어사], 강창귀(姜昌貴)[판도정랑], 강군보(姜君寶)[?~1380, 정당문학], 강시(姜蓍)[1339~1400, 밀직부사], 강회백(姜淮伯)[1357~1402, 정당문학]으로 이어지면서 고려 말까지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은렬공파 강민첨도 『고려사』 열전에 실린 인물이다. 강민첨은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전공을 많이 쌓아 입신하였으며, 대장군·병부상서·지중추부사 등 고위직을 지냈다. 1010년(현종 1)에 거란군이 침입하여 곽주와 숙주를 거쳐 서경에 쳐들어오자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이를 방어하였다. 1018년에 재차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오자 상장군 강감찬(姜邯贊)[948~1031]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에서 적을 격파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으로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입향 경위]

진양강씨의 함양 지역 입향은 조선 성종조에서부터 고종조까지 모두 24차례 있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최초의 입향은 성종조에 현감 강이경(姜利敬)의 아들 강한(姜漢)[1454~?]이 서울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고을 남쪽 남촌(南村)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이어서 명종조에는 전적 강문회(姜文會)[1433~1499)의 아들 강현(姜顯)[1486~1553)이 단성에서 들어와 고을 동쪽 대수[함양읍 대수마을]에 자리잡았다. 강한은 성종조에 함양군수를 지내고 함양에 정착한 화순최씨 최한후(崔漢候)의 손녀 사위였다. 이조판서를 지낸 강허손의 현손인 강여중(姜汝仲)도 명종조에 진주에서 들어와 고을 서쪽 백전[백전면 양백리 서백마을]에 정착했다. 시기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강현(姜顯)[1486~1553]의 아들 강공하(姜公賀)도 수원(水原)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장자동[지금의 안의면 장자동]에서 살았다.

광해군조에는 은렬공 강민첨의 후손 강대량(姜大良)이 합천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문정리[휴천면 문정리]에 살았고, 현종조에 어사 강사첨(姜師瞻)의 후손 강언환(姜彦桓)이 단성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화산[수동면 화산리]에서 살았다. 숙종조에는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후손 강이대(姜爾大)와 강헌삼(姜憲三)이 영광(靈光)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각각 매암[마천면 덕전리 매암마을]과 문정에 정착하였다. 영조조에는 네 차례 입향이 있었다. 청풍군수 강혜(姜徯)의 후손 강건(姜楗)[1817~1881]은 의령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문헌동(文獻洞)[휴천]에 살았고, 강대연(姜大延)[1606~1655]의 현손 강광여(姜光呂)와 강광제(姜光齊)는 산청에서 들어와 남호(南湖)[휴천]와 강청(江淸)[마천]에 자리잡았다. 은렬공 강민첨의 후손 강임(姜鈓)은 진주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죽산(竹山)[수동]에 거주했다.

정조 조에 강대수(姜大遂)[1591~1658]의 후손 강규장(姜奎章)은 합천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죽곡(竹谷)[석복면]에서 살았으며, 순조 조에 진산부원군 강계용(姜啓庸)의 후손 강영관(姜永寬)은 함양읍에서 황대(黃垈) [안의]로 이주하였다. 헌종 조에도 강희맹의 후손들이 두 차례에 걸쳐 함양에 입향하였다. 사간원 정언을 역임한 강재면(姜在勉)은 진주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백천(白川)[함양읍] 및 금당(金塘)[서상면]에 들어왔고, 강귀회(姜龜會)는 영광에서 들어와 내마(內馬)[마천]에 자리잡았다.

철종조에도 네 차례에 걸쳐 진주강씨의 함양 입향이 이루어졌다. 강인수(姜人壽)의 아들 강석용(姜錫龍)은 합천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휴천면 문정리에 정착하였고, 강희맹의 후손 강연(姜沿)은 남원에서 들어와 자손들이 호산(湖山)[휴천면 호산리]에 자리잡았다. 강회백(姜淮伯)[1357~1402]의 후손 강인수(姜仁秀)는 진주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유평[유림면 유평리 유평마을]에 살았고, 강성구(姜聖九)의 후손 강태주(姜台周)는 진주에서 들어와 지곡[유림면 손곡리 지곡마을]에 거주했다.

고종조에는 강희맹의 후손 중 강장환(姜章煥)이 구례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양천[백전면 오천리 양천마을]에서 살았다. 입향한 시기를 확인할 수 없지만 강희맹의 후손 강석기(姜錫麒)는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들어와 월소촌(月沼村)[안의]에 자리잡았고, 소요당(逍遙堂) 강문회(姜文會)[1433~1499]의 후손 강재화(姜在華)는 함양읍에서 안의면 초동[안의면 초동리]과 봉현(鳳峴)으로 옮겨 살았다. 강민첨의 후손 강효덕(姜孝悳)은 경상남도 고성에서 들어와 서상면 금당리에 정착하였다.

[현황]

진주강씨는 함양의 주요 성씨이다. 진주강씨는 여러 차례 함양 입향을 통하여 함양군 내 여러 지역에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1934년 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의 성』에서는 함양군의 진양강씨가 함양면 백천리에 18세대, 지곡면 창평리에 42세대, 덕암리에 21세대, 휴천면 문정리에 28세대, 수동면 내백리에 45세대, 백전면 양백리에 21세대, 안의면 월림리에 27세대 규모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집성촌의 세대 수만 해도 202세대에 이른다.

2000년의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진주강씨는 전국 30만 724가구 96만 6,710명, 함양군은 708가구 1,807명이었다. 2015년 인구 통계에서는 전국이 116만 3,539명이고, 함양군이 1,643명이었다. 2015년 기준으로 함양의 진주강씨는 함양군 전체 인구 3만 7,898명의 4.3%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함양군의 진주강씨는 이전의 집성촌을 상당 정도 유지하면서 함양읍 대덕리 죽장마을·신관리 기동마을·죽곡리 죽곡마을·구룡리 조동마을, 마천면 강청리 강청마을, 휴천면 대천리 대포마을, 유림면 옥매리 옥동마을, 수동면 내백리 내백마을, 지곡면 창평리 거평마을·시목리 봉곡마을·덕암리 주암마을·평촌리 두동마을, 안의면 황곡리 이문마을, 백전면 오천리 양천마을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관련 유적]

개암선생문집책판(介庵先生文集冊板)[시도유형문화재 제167호, 1972년 12월 29일]은 개암 강익의 문집을 널리 간행하기 위하여 만든 책판이다. 강익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으로, 1549년(명종 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66년(명종 21)에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의 신원(伸冤)[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냄]을 회복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렸다. 평생 학문과 후진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남계서원(灆溪書院)에 봉향되어 있다.

상·하 1책으로 되어 있다. 상권에는 시(詩)·서(書)·기(記)·추록(追錄), 하권에는 세계(世系)·연보·행장·제문(祭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문은 1706년(숙종 32)에 정지윤이 썼으나 간행 기록으로 보아 간행은 이미 1686년(숙종 12)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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