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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농민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58
한자 日帝强占期農民運動
영어공식명칭 Peasant Movement during th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8년 4월 12일 - 농민운동 단체 ‘입선농우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9년 3월 말 - 인재육성기관 전습소 설치
입선농우회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석복면 백연리]지도보기
인재육성기관 전습소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교북리 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1910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일어난 농민운동.

[개설]

일제는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을 통해서 조선의 농촌을 일본의 식량 원료 공급지로 재편성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소작농들은 50~60%의 높은 소작료를 낼 뿐만 아니라 소작 계약도 매년 갱신해야만 하는 불안정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자작농도 각종 지세와 수리조합비 때문에 결국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에서 마땅한 기술이 없는 농민들이 도시로 떠나 임금노동자로 전환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조선의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나 빈농으로 전락하여 지주들과 대립하였고, 지주들을 비호하는 일본과 투쟁하는 노선을 걷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1930년대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는 1938년부터 가마를 이용해 관솔에서 솔기름을 뽑아 공출(供出)에 응하였는데, 여기에는 학생과 농민들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솔기름의 생산은 송탄유굴 8기가 발굴된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제는 부족한 연료를 확보하기 위해 1942년부터 식민지 자원수탈의 일환으로 관솔 따기에 소학교 학생들까지 동원하였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도 부족한 연료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학생과 농민들이 착취되고 수탈당하였다.

[활동]

경상남도 함양 지역은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이 여러 조직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4월 12일에는 함양군 석복면(席卜面) 백연(栢淵)리에서 ‘입선농우회’라는 농민운동 단체가 창립되었고, 함양농회라는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함양농회에서는 1929년 3월 말, 지방 잠업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함양군 안의면 교북리(校北里)에 전습소(專習所)를 설치하여 인재육성을 실시하였다. 또한 1929년 2월 25일, 함양군 회의실에서 함양농회 제6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1935년 3월 15일에는 함양농회 12회 총회 및 평의회를 개최하기도 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함양농회의 활동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농민들의 농사 활동을 지원하고 농민들과 상호 친목을 도모하며, 미신을 타파하는 활동도 하였다. 또한 문맹퇴치 등의 계몽 활동을 진행하여 지방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

[의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농민운동은 농민 계몽 운동에 집중하였으나, 그 이면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고취시키는 것 또한 내재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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