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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사회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56
한자 日帝強占期社會運動
영어공식명칭 Social Movement during th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미숙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일제강점기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고 민족운동을 고취시키기 위해 진행한 일련의 운동.

[개설]

사회운동이 일정한 이념을 갖춘 항구적인 조직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사회가 성립된 이후부터이다. 산업사회에서 야기된 제반 모순에 저항하여 사회를 개량하거나 사회개조를 도모하려는 근대적 사회운동은 서구에서 19세기 중엽 이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내재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전개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사회가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내적 모순과 외세침략이 자아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운동이 일어나고 발전하였다.

[역사적 배경]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일본은 국권회복·반일운동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탄압하면서 1910년 8월 조선을 강점하였다. 그 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35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목적은 상품시장 확보, 원료·식량 공급지 조성, 대륙침략을 위한 경제적·군사적 기지구축에 있었다. 결국 한국경제는 일본경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형적인 식민지 경제구조로 편성되었다. 그 결과 조선 민중의 생활 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춘궁민·토막민·화전민의 존재를 통해 악화된 실정이 입증된다.

일본의 침략에 맞선 항일독립운동은 각계각층에서 전개되었고 날로 심화되었다. 3·1운동 이전 비교적 자연발생적이고 산발적인 운동 형태를 취하였으나, 3·1운동 이후 각종 사회운동이 점차 조직화된 운동 형태로 발전되었다. 특히 일제의 대륙침략기인 1930년대 이후부터는 각종 사회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지하운동으로 전환되고 급진사상운동과 연계를 맺으면서 질적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는 일찍이 민족의 정기를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교육뿐임을 절감하고 사립함명학교 등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3·1운동의 시기에는 함양군에서는 함양읍과 안의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주동자 및 군중 다수가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아 청년들의 자각이 일어나고 지역 유지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하여 친목단체를 조직하여 음성적인 활동을 하거나 지하로 스며들어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타향이나 외국으로 나가 활동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함양의 사회운동]

경상남도 함양에도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을 한 인물이 많다. 양지환·노준영·박수영·권영근 외 10여명이 발기하여 문화촉진이란 명목으로 1920년 8월 1일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죽곡리[석복면 죽곡리] 양지환 자택에서 함양청년회 설립모임을 가졌다. 비록 단체의 영향력은 미미하였으나 애국애족 활동, 계몽활동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또한 1927년 2월부터 1931년 전반기까지 존속했던 신간회 함양지회의 활동도 일제강점기 함양 지역의 사회운동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신간회 함양지회는 앞서 언급한 청년회의 주요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삼우회, 어린이회와 같은 소년·소녀단체의 통일을 위해 함양 소년회가 조직되었으며 웅변대회, 문화전람회, 독서회 등을 개최하여 청년운동과 다른 활동 양성을 보이며 함양 지역의 특징적인 사회운동의 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함양 지역에서도 경상남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신분해방운동이 진행되었다. 특히 함양에서는 형평사를 설립하여 형평운동을 진행함과 동시에 함양형평청년회가 별도로 조직된 것으로 보아, 경상남도의 다른 지역보다 조직면에서는 신분행방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노동운동, 농민운동, 독립운동, 야학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이 일어났음을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경상남도 함양 읍내에서 대규모의 유혈 사태가 발생한 기록이 보인다. 동아일보 1933년 2월 1일자 신문기사에서는 1월 28일 300여 명의 ‘폭도’들이 산청읍 일대를 습격, 함양으로 진격하던 중 인근 군경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곧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지역의 독립운동 또한 급진적이고 조직적으로 변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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